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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이야기/프랑스의 화학자들

프랑스의 화학자 - 1.라부아지에, 근대화학의 아버지

Antoine-Laurent de Lavoisier, 화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면 알아야 하는 사람이고,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본 이름일 것 이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는 18세기 프랑스에서 태어난 귀족이다.

Portrait of Antoine-Laurent de Lavoisier and his wife. painted by Jacques-Louis David

 왜 그는 근대 화학의 아버지 일까? 이전의 화학 연구는 정성적인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A와 B를 넣으면 C가 된다" 는 식의 지금으로 보면 허점이 많은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그에 비해 라부아지에는 처음 정량적인 연구 (quantitative chemical experiments) 를 설계하고 실행한 화학자로 평가 받는다.  

휘갈겨쓴 실험설계 메모, 실험 노트에 옮겨적기 전 구상단계이다. 

 이해하기 힘들것 같아 내가 쓴 메모를 가지고 왔다. 보다시피 물질이름, 필요한 질량과 그 몰수, 그 물질을 녹인 solvent의 부피 등이 적혀있다. 화학 실험을 한다면, 뭐를 얼마나 넣었는지가 중요하고 그 중 분자수, mol을 명시하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다. 예를 들어 수소와 산소를 반응 시켜 넣은 반응물이 전부 물이 되도록 하고 싶다면, 수소와 산소 몰수(mol) 를 2:1 비율로 넣어야 할 것이다. 반응물의 비율은 굉장히 중요해서, 이에 따라 화학반응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같은 개념은 현대 화학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라부아지에가 살던 18세기에는 개념이 확실히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라부아지에를 화학양론 (stoichiometry) 을 개척한 선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산소를 이름짓고 연소에는 산소가 필요한 것을 규명했으며, 화학물의 명명법을 규정하고, 정량적 실험을 위한 측정기 개발에 기여함으로서 Chemical revolution 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광장에서 목이 잘리는 귀족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743년 태어나 1794년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광장 한복판에서 길로틴으로 목이 떨어졌다. 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는 프랑스 귀족들에게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하루에도 귀족들이 몇십명씩 잡혀갔고, 재판은 공정성을 잃었다. 많은 귀족들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처단되었다. 라부아지에 역시 세금징수원으로 일했다는 명목으로 재판에 섰고, 어떤 변호도 성난 군중 앞에서 통하지 않았다. 화학의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도 허무했다.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변호를 포기하고 대신 실험을 끝낼 수 있도록 처형을 2주만 미루어 달라고 간청했지만 재판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무시했다. 

"La République n'a pas besoin de savants ni de chimistes; le cours de la justice ne peut être suspendu." 

"프랑스 공화국은 화학자나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의 집행은 미뤄질 수 없다."

 그렇게 혁명의 분노는 재판부가 논리와 상식을 보지 못하게 했고, 라부아지에는 곧장 광장으로 끌려가 목이 잘렸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의 초라한 최후였다.  

평민으로 태어난게 죄가 아니라면, 귀족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다. 

 프랑스혁명은 시민의 힘으로 국가 주권을 쟁취한 민주주의 항쟁의 표본이다. 그때 사람들의 분노를 내가 평가한다는 것도 주제넘는 짓이다. 하지만, 과학을 이끌어가는 거인들이 역사의 물결에 쉽게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어쩔수가 없다.